NAJU · WALLED TOWN WALK
나주읍성 걷는 방법
전봉준은 서성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羅 州 邑 城
읽는 시간 약 12분 · 걷는 시간 약 1시간 30분
1894년 동학농민군은 전라도의 고을을 차례로 손에 넣었습니다. 그 기세 속에서도 끝내 성문을 열지 않은 고을이 있었습니다. 전라도에서 나주와 운봉, 단 두 곳뿐이었다고 합니다.5 그런데 그 나주성 안으로, 농민군 최고 지도자 전봉준이 칼 대신 열 명 남짓한 일행만 데리고 서문을 지나 걸어 들어간 날이 있습니다.
그는 무엇을 하러 들어갔고, 왜 빈손으로 나왔을까요. 오늘은 그 질문을 붙들고 객사 금성관에서 출발해 목사의 살림집과 네 개의 성문을 차례로 걸어 봅니다. 그러다 보면 이 성이 천 년 가까이 '전라도의 절반'을 쥐고 있던 이유도 함께 보입니다.
| 위치 | 전라남도 나주시 원도심 일대 (출발점 금성관: 금성관길 8) |
| 형태 | 평지에 고을을 둘러싼 읍성. 고려 토성 위에 조선 석성을 덧쌓음 |
| 연대 | 고려 때 이미 존재(1237년 기록), 1404년 돌로 개축 |
| 규모 | 추정 둘레 약 3.3~3.5km, 서쪽 성벽 약 250m 남음 |
| 성문 | 동점문 · 서성문(영금문) · 남고문 · 북망문 (모두 복원) |
| 지정 | 사적 (1990년 10월 31일) / 금성관 보물 (2019년) |
土
CHAPTER 01
흙성 위에 돌성, 숫자로 읽는 네 번의 확장
나주성이 문헌에 처음 또렷이 나오는 것은 『고려사』 김경손 열전입니다. 1237년 전라도 일대에서 난이 일어났을 때 반란군이 나주성을 에워쌌다는 대목이지요. 성은 이미 고려 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셈입니다.1 발굴 조사에서도 지금 남은 조선 석성 아래에서 흙을 다져 쌓은 고려 판축 토성이 확인되었고, 북문 밖에서는 성을 감싸던 해자 흔적이 나왔습니다.
흙성을 돌성으로 바꾼 것은 조선 태종 때입니다. 실록은 이 일을 아주 짧게 적어 두었습니다.3
"나주(羅州)와 보성(寶城)의 성(城)을 쌓았다."
— 『태종실록』 4년(1404) 10월 1일
한 줄짜리 기록이지만, 이후 나주성은 여러 번 몸집을 키웁니다. 재미있는 것은 시대마다 남은 둘레 기록이 제각각이라는 점입니다.
| 문헌에 남은 둘레 | 읽는 법 |
|---|---|
| 1,162보 | 가장 작은 규모의 기록 |
| 3,126척 | 약 940m로 환산되는 기록. 높이 9척, 포루 3곳, 우물 약 20곳 |
| 5,320척 | 한 차례 더 넓어진 성 |
| 9,966척 | 가장 큰 기록. 지금 추정하는 둘레 약 3.3~3.5km와 통한다 |
연구자들은 이 숫자 차이를 단순한 오기가 아니라 성이 네 단계에 걸쳐 넓어진 흔적으로 봅니다.12 세조 무렵 나주목사 김계희가 재임하던 1457~1459년에 성을 넓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반대로 1550년과 1555년에는 큰비에 성벽이 무너졌고, 임진왜란 때는 성이 함락되어 1599년에야 고쳐 쌓았습니다. 숫자 네 개가 곧 이 성의 이력서인 셈입니다.
館
CHAPTER 02
작은 한양의 한가운데, 금성관
성 안 걷기는 객사 금성관(錦城館)에서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객사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와 궐패를 모셔 두고, 고을 수령과 관리들이 한양 쪽을 향해 절하는 망궐례를 올리던 곳입니다. 동시에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가 묵는 숙소이기도 했습니다. 나주를 두고 '작은 한양(소경)'이라 부르는 말이 전해지는데,6 그 한양의 상징이 바로 이 건물입니다.
금성관 앞에 서면 세 가지를 확인해 보세요.4
① 크기. 금성관 정청은 현재 남아 있는 조선 객사 정청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큽니다. 2019년 보물로 지정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② 지붕. 객사 정청은 대개 옆면이 '人' 자로 잘린 맞배지붕인데, 금성관은 네 귀가 모두 들린 팔작지붕입니다. 격을 한층 높인 셈입니다.
③ 월대와 단청. 건물 앞에 넓은 기단(월대)을 두고, 단청에 용 무늬를 넣었습니다. 왕의 상징을 모신 집이라는 표시입니다.
건물의 나이도 생각보다 깊습니다. 국가유산청은 지금 골조가 1617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며, 1775년과 1885년에 손을 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군청 청사로 쓰이며 모습이 바뀌었고, 1976년 수리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습니다.4
守
CHAPTER 03
1894년, 농민군이 넘지 못한 성
1894년 봄 동학농민군이 일어나자 나주목사 민종렬은 성을 지키는 쪽을 택했습니다. 성을 지킬 수성군을 꾸렸는데, 5월 초 무렵 그 수가 약 1,800명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맞은편에는 전봉준의 측근 최경선이 이끄는 약 3,000명의 농민군이 있었습니다.5
농민군이 노린 곳은 서쪽이었습니다. 밤을 틈타 서성문을 기습했지만 성은 버텼습니다. 이 야습 날짜는 자료에 따라 7월 1일, 7월 5일로 달리 전하는데,56 결과만큼은 같습니다. 성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숫자로 보면 더 흥미롭습니다. 공격하는 쪽이 수비하는 쪽보다 두 배 가까이 많았는데도 성을 넘지 못했습니다. 돌로 쌓은 성벽과 성 안 수성군의 결속이 버텨 낸 결과였습니다. 바로 이 실패가 다음 장면을 낳습니다.
談
CHAPTER 04
전봉준은 서성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무력으로 성을 열지 못하자 이번에는 전봉준이 직접 나섭니다. 8월 13일, 그는 약 10명의 일행만 데리고 서성문을 지나 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5 한 달여 전 농민군이 칼과 창으로 뚫지 못한 바로 그 문이었습니다.
담판이 벌어진 곳은 목사가 살던 살림채, 지금의 나주목사내아로 전해집니다. 전봉준은 목사 민종렬과 마주 앉았지만 두 사람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담판은 결렬되었습니다. 전봉준은 들어온 문으로 다시 걸어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56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0월 20일에는 손화중과 오권선이 이끄는 약 13,000명이 다시 나주를 공격했지만 이번에도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겨울 농민군이 무너진 뒤의 나주는 진압의 거점이 됩니다. 1895년 1월 5일 일본군 221명이 나주에 주둔했고, 나주에서만 230명의 농민군이 희생되었다고 남도일보는 전합니다.5
"전라도에서 동학농민군에게 함락되지 않은 고을은 나주와 운봉뿐이었다."
— 남도일보, 2025년 4월 15일 기사 내용 (요지)
성을 지킨 쪽은 1895년 그 공을 비석에 새겼습니다. 기우만이 글을 지은 금성토평비(錦城討平碑)입니다. '금성(나주)에서 적을 쳐서 평정했다'는 이름 그대로 수성군의 시각에서 쓴 기록이지요. 이 비는 2019년 다른 비석들과 함께 한자리로 옮겨져 모두 27기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비 앞에 서면, 같은 사건을 두고 한쪽은 '평정'이라 새기고 다른 쪽은 '혁명'으로 기억한다는 사실을 함께 떠올려 보시길 권합니다.
칼로 넘지 못한 문을, 말로 넘으려 했다.
서성문은 1894년에 두 번 시험받았습니다. 밤의 기습에도, 낮의 담판에도 뜻대로 열리지 않았지요. 나주읍성을 걸을 때 성벽의 높이보다 그 문 앞에 섰던 사람들의 선택을 먼저 떠올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門
CHAPTER 05
101년 만에 다시 선 네 개의 문
농민군이 넘지 못한 성은 20세기에 허물어졌습니다. 일제강점기 철도와 신작로, 경찰서 같은 시설이 들어서면서 성벽과 성문이 차례로 헐렸고,1 남문 남고문은 1917년에 철거되었습니다. 지금 원래 성벽이 비교적 온전히 남은 곳은 서쪽 약 250m 정도입니다.
복원은 남쪽에서 시작했습니다. 1993년 남고문, 2006년 무렵 동점문, 2011년 10월 서성문이 차례로 다시 섰고, 2018년 12월 마지막으로 북망문이 약 44억 원을 들여 홍예식 문으로 복원되었습니다. 1920년 『속수나주지』의 기록과 사진을 근거로 했다고 합니다. 이로써 나주는 101년 만에 네 개의 성문을 모두 되찾았습니다.7
문 이름을 알고 걸으면 성이 한결 입체적으로 보입니다. 이름에 담긴 뜻은 다음처럼 풀이됩니다.8
동점문(東漸門) · 동쪽으로 흐르는 나주천이 영산강으로 '점점 스며든다'는 물길의 이미지를 담았습니다.
서성문, 영금문(暎錦門) · '두루 나주(금성)를 비춘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편액 이름은 1815년 무렵의 『나주목여지승람』에 근거한 것으로 나주시는 소개합니다.6
북망문(北望門) · 북쪽, 곧 임금이 있는 한양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남고문(南顧門) · 남문을 나서면서도 북쪽을 돌아본다는 뜻을 담았다고 합니다.
"북망문은 임금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남고문은 남쪽으로 떠나며 북쪽을 돌아본다."
— 아틀라스뉴스, 「나주읍성 4대문 이름 풀이」, 2023년 8월 21일 (요지)
네 문 가운데 둘이 한양을 향한 마음을 이름에 담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금성관의 망궐례와 같은 맥락입니다. 성문 이름만으로도 '작은 한양'이 스스로를 어떻게 여겼는지가 드러납니다.
| 연도 | 나주읍성에 일어난 일 |
|---|---|
| 1237 | 『고려사』에 나주성 포위 기록 |
| 1404 | 태종, 나주성을 돌로 쌓음 |
| 1457~1459 | 목사 김계희 재임 중 성 확장 |
| 1592 · 1599 | 임진왜란으로 함락, 전쟁 뒤 수리 |
| 1894 | 농민군 공격 격퇴, 전봉준 서성문으로 입성해 담판 |
| 1895 | 일본군 주둔, 금성토평비 건립 |
| 1917 | 남고문 철거 등 성곽 훼철 |
| 1990 | 사적 지정 |
| 1993~2011 | 남고문 · 동점문 · 서성문 차례로 복원 |
| 2018 · 2019 | 북망문 복원으로 4대문 완성 / 금성관 보물 지정 |
步
WALK
1894년의 동선을 따라 원도심 한 바퀴
나주읍성은 산성이 아니라 도시 한가운데 있는 평지 성이라, 성벽 위를 걷는 대신 옛 성 안 골목을 지나며 네 문을 이어 도는 방식이 됩니다. 금성관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1894년의 무대를 먼저 보고, 북·동·남으로 시계 방향을 그리면 동선이 자연스럽습니다. 문마다 머무는 시간을 넣어 1시간 30분 안팎을 잡으세요.
| 순서 | 지점 | 놓치지 말 것 |
|---|---|---|
| 1 | 금성관 | 팔작지붕, 넓은 월대, 용 무늬 단청 |
| 2 | 금성토평비 | 비석 이름 속 '토평(討平)'이라는 단어, 27기의 비석 무리 |
| 3 | 나주목사내아 | 1894년 담판 장소로 전해지는 목사의 살림채 |
| 4 | 서성문(영금문) | 가장 길게 남은 서쪽 성벽, 전봉준이 들어선 방향 |
| 5 | 북망문 | 2018년 마지막으로 복원된 홍예문 |
| 6 | 동점문 | 둥근 옹성, 문 밖 석당간 |
| 7 | 남고문 | 네 문 가운데 가장 먼저(1993) 복원된 문 |
· 출발점은 금성관(나주시 금성관길 8)이 편합니다. 목사내아와 금성토평비가 가까이 모여 있습니다.
· 성문과 성문 사이는 차가 다니는 원도심 도로와 골목이 섞여 있습니다. 횡단보도와 좁은 골목에서는 차량에 주의하세요.
· 여름에는 그늘이 적은 구간이 있으니 물과 모자를 챙기세요.
· 금성토평비는 승리한 쪽의 기록입니다. 농민군 쪽 기록과 함께 읽어야 균형이 맞습니다.
· 관람 시간, 휴관일, 주차와 해설 운영은 바뀔 수 있으니 나주시 문화관광 누리집에서 확인하고 가세요.
서성문 앞에 서서 성 밖 방향을 한번 바라보세요. 1894년 여름, 한 번은 횃불을 든 수천 명이, 한 번은 열 명 남짓한 일행이 이 문을 향해 다가왔습니다. 문은 두 번 모두 그들을 돌려보냈습니다. 복원된 성문은 새 돌로 쌓았지만, 그 앞에서 갈라진 선택과 그 뒤의 희생은 지금도 이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참고 자료
1. 「나주읍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ncykorea.aks.ac.kr/Article/E0011500). 『고려사』 김경손전 등 인용 포함
2.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나주읍성」 (heritage.go.kr)
3. 『태종실록』 4년(1404) 10월 1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4. 국가유산청 보도자료, 나주 금성관 보물 지정 관련, 2019.10.25.
5. 남도일보, 1894년 나주 수성군과 동학농민군 관련 기사, 2025.4.15.
6. 나주시청 누리집 (naju.go.kr), 나주읍성 · 금성관 · 동학농민혁명 안내
7. 뉴스로, 2018.12.26. / 연합뉴스, 2018.12.27. (나주읍성 북망문 복원 준공)
8. 아틀라스뉴스, 나주읍성 4대문 이름 풀이, 2023.8.21.
※ 인용문은 위 자료의 내용을 줄여 옮긴 것입니다. 1894년 사건의 날짜는 자료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사진은 Wikimedia Commons(각 사진 아래 저작자·라이선스 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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