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과 성곽

수원화성 걷는 방법 — 영수증이 성을 다시 세웠다

레트블 2026. 10. 16. 08:51

SUWON · FORTRESS WALK

수원화성 걷는 방법

영수증이 성을 다시 세웠다

水 原 華 城

읽는 시간 약 13분 · 걷는 시간 약 3시간

수원화성 성벽과 잔디 언덕
PHOTO 01 · 언덕을 따라 굽이치는 수원화성 성벽. 지금 보이는 돌의 상당 부분은 1970년대에 다시 쌓은 것이다.

Bernard Gagnon · CC0 (Wikimedia Commons)

수원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장안문과 창룡문이 완전히 부서졌고, 지금 걷는 성곽의 많은 부분은 1970년대 후반에 복원된 것입니다. 절반쯤 새로 쌓은 성이 어떻게 '진정성'을 인정받았을까요?

답은 돌이 아니라 책에 있습니다. 공사가 끝난 뒤 정조의 명으로 만든 『화성성역의궤』는 성을 찬양하는 기념서라기보다, 누가 며칠 일했고 얼마를 받았으며 자재가 얼마나 들었는지 적은 거대한 공사 정산 보고서에 가깝습니다. 오늘은 그 영수증을 한 장씩 넘기며 성벽을 걸어봅니다.

위치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장안구 일대
형태 평지와 팔달산을 함께 두른 석축 읍성, 4대문과 5개 암문
규모 둘레 5,744m(자료에 따라 약 5.4km), 면적 약 130ha, 성벽 높이 4~6m
축성 1794년 1월 착공, 1796년 9월 완공 (정조 18~20)
지정 사적 (1963년 1월 21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1997년 12월)

帳

CHAPTER 01

10년 계획, 2년 9개월의 공사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으로 옮긴 뒤, 그 아래 새 고을을 만들고 성을 두르기로 했습니다. 처음 조정이 내다본 공사 기간은 약 10년이었습니다. 실제 공사는 1794년 1월에 시작해 1796년 9월에 끝났습니다.3 계획의 3분의 1도 안 되는 시간입니다.

속도를 낸 비결로 자주 꼽히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술입니다. 정약용이 청나라를 거쳐 들어온 서양 기계 서적 『기기도설』을 참고해 고안한 거중기는 도르래로 무거운 돌을 들어 올렸습니다. 다른 하나는 관리 방식입니다. 구간마다 책임자의 이름을 성돌에 새기는 실명 책임제를 두어, 부실하게 쌓으면 누가 쌓았는지 바로 드러나게 했습니다.3

성의 크기도 계획보다 커졌습니다. 정약용이 처음 구상한 둘레는 약 4km였지만, 실제로는 팔달산과 주변 지형을 넓게 품으면서 약 5.4km로 늘었다고 합니다.2 거중기가 공사비를 얼마나 아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숫자가 떠돌지만, 확인 가능한 1차 근거를 찾기 어려워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錢

CHAPTER 02

하루 품삯 2전 5푼

조선의 큰 공사는 대개 백성을 무상으로 불러 모으는 부역에 기댔습니다. 화성은 달랐습니다. 일한 사람에게 날마다 품삯을 주었고, 그 금액이 의궤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숫자를 나란히 놓아 보면 18세기 공사장의 풍경이 꽤 구체적으로 보입니다.4

항목 의궤에 적힌 숫자
모군(잡역 인부) 하루 품삯 2전 5푼
목수·미장이 하루 품삯 4전 2푼
석수 패(돌 다루는 장인 조) 4전 5푼에 쌀이 더해짐
참고: 당시 쌀 1섬 값 약 5냥 (모군 품삯 약 20일치)
장인 품삯 합계 128,735냥 (그중 석수가 52.3%)
전체 인건비 304,817냥
물자(자재) 비용 390,201냥

1냥은 10전, 1전은 10푼입니다. 쌀 한 섬이 약 5냥이었다니, 날품팔이 인부가 스무 날 남짓 일해야 쌀 한 섬을 살 수 있었던 셈입니다. 돌을 깎고 쌓는 석수의 몫이 장인 품삯의 절반을 넘는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이 성이 무엇보다 '돌의 공사'였다는 뜻이지요.

가장 인상적인 줄은 따로 있습니다. 공사 중 병이 난 사람에게도 쌀 1되와 돈 1전을 주었다는 기록입니다.4 일하지 못한 날의 지출까지 장부에 올린 것입니다.

名

CHAPTER 03

김노랭이와 이자근노미

의궤가 특별한 이유는 금액보다 이름에 있습니다. 공사에 참여한 장인 1,821명과 관원 376명, 모두 2,197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김노랭이, 이자근노미처럼 족보에도 오르지 못했을 평범한 사람들의 이름이 섞여 있습니다.5 왕실 기록에 공사판 일꾼의 이름이 한 사람씩 적힌 것은 드문 일입니다.

공사에 투입된 연인원은 31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됩니다.4 정조는 이 숫자들을 책으로 남기는 이유를 직접 밝혔습니다.

"성을 쌓는 데에 든 비용이 거의 80만에 가까운데… 이 책을 간행하여…"
— 『정조실록』 20년(1796) 11월 9일 (재인용, 요지)6

큰돈이 들었으니 어디에 썼는지 낱낱이 밝혀 두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국가 사업의 결산 보고서를 공개한 셈입니다. 의궤는 1796년 11월 10권 10책으로 정리되었고, 1801년 9월 활자로 간행되었습니다.1

圖

CHAPTER 04

설계도처럼 읽는 그림

장부만 있었다면 성을 다시 쌓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의궤에는 '도설(圖說)'이라 부르는 그림과 설명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성문, 포루, 공심돈 같은 시설을 바깥에서 본 모습, 안에서 본 모습, 잘라서 본 단면까지 나누어 그렸습니다.

화성성역의궤 도설 페이지
PHOTO 02 · 『화성성역의궤』의 한 면. 시설의 입체 그림 옆에 크기와 쓰임을 적은 설명이 붙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 공공누리 제1유형 (Wikimedia Commons)

대표적인 예가 화서문 옆 서북공심돈입니다. 공심돈은 속이 빈 망루로, 안에 층을 두고 벽에 구멍을 내어 바깥을 살피고 총을 쏠 수 있게 한 시설입니다. 의궤의 그림과 지금의 건물을 나란히 보면, 이 책이 왜 '설계도'로 불리는지 바로 이해가 됩니다.

화성성역의궤 서북공심돈 도설
PHOTO 03 · 의궤에 실린 서북공심돈 그림. 왼쪽부터 바깥면, 안쪽면, 내부 구조.

작자 미상 ·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눈 덮인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PHOTO 04 · 오늘의 서북공심돈(왼쪽)과 화서문(오른쪽). 그림과 실물을 비교하며 보기 좋은 지점이다.

Jpbarrass ·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완공 당시 화성에는 48개의 시설이 있었고, 그중 7곳은 지금도 사라진 상태입니다.4 남은 41곳과 복원된 구간 대부분이 바로 이 그림들을 근거로 되살아났습니다.

성벽을 걸으며 의궤의 숫자를 직접 확인해 볼 수도 있습니다. 성벽 높이는 대체로 4~6m이고, 동서남북 네 대문 외에 적의 눈을 피해 드나들던 암문이 다섯 곳 있습니다.2 문을 하나 지날 때마다 그림 속 모습과 비교해 보세요. 돌의 크기나 쌓은 결이 조금씩 다른 구간을 찾을 수 있는데, 원래의 돌과 복원 때 새로 넣은 돌이 만나는 자리일 가능성이 큽니다.

復

CHAPTER 05

1951년의 장안문, 1979년의 장안문

1951년 1월 파괴된 장안문
PHOTO 05 · 1951년 1월의 장안문. 문루가 무너지고 성문 앞에 전차가 서 있다.

Gene Putnam / Harry S. Truman Library & Museum ·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근현대를 거치며 화성은 크게 상했습니다. 유네스코의 설명에 따르면 전쟁으로 장안문과 창룡문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도시가 커지면서 도로가 성벽을 아홉 군데나 뚫고 지나가게 되었습니다.8

복원은 1960년대부터 이어졌고, 1975년부터 1979년까지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때 복원팀의 기준이 된 것이 의궤였습니다. 문의 크기와 모양, 돌을 쌓는 방식을 그림과 기록에 맞춰 되살렸고, 유네스코는 이 과정이 의궤라는 상세한 기록에 근거했다는 점을 진정성 판단의 근거로 들었습니다.8

"만일 의궤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 김장훈, 국가유산청 기고문 (요지)7

그 뒤에 이어질 말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기록이 없었다면 복원은 추측이 되었을 테고, 추측으로 쌓은 성은 세계유산이 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복원은 지금도 진행 중이어서, 남수문은 2012년 6월에야 다시 섰습니다.4

성은 무너져도, 장부는 남는다.

수원화성의 진짜 유산은 돌벽만이 아닙니다. 누가, 며칠, 얼마를 받고, 어떤 모양으로 쌓았는지 숨기지 않고 적어 둔 230년 전의 정산서가 무너진 성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연도 수원화성에 일어난 일
1794.1 화성 축성 시작
1796.9 공사 완료 (약 2년 9개월)
1796.11 『화성성역의궤』 정리, 10권 10책
1801.9 의궤 활자 간행
1951.1 한국전쟁 중 장안문 폐허 사진 기록
1963.1.21 사적 지정
1975~1979 의궤를 근거로 한 대규모 복원
1997.12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2012.6 남수문 복원

步

WALK

의궤를 들고 한 바퀴

성곽 한 바퀴는 약 5.7km, 천천히 걸으면 3시간 안팎이 걸립니다.9 남쪽 팔달문에서 시작해 팔달산을 먼저 오르고 시계 방향으로 도는 코스를 권합니다. 오르막을 체력이 남았을 때 끝내고, 나머지는 평지에 가까운 길을 걷게 되기 때문입니다.

순서 지점 놓치지 말 것
1 팔달문 도로 한가운데 섬처럼 남은 남문, 반원형 옹성
2 서남암문 성벽 속 비밀 통로
3 서장대 팔달산 정상의 지휘소, 성 전체 조망
4 화서문 · 서북공심돈 PHOTO 03 도설과 실물 비교하기
5 장안문 1951년 사진과 같은 각도에서 바라보기
6 화홍문 · 방화수류정 물길 위 무지개 수문, 연못 위 정자
7 동북공심돈 · 연무대 둥근 망루와 군사 훈련장
8 창룡문 전쟁으로 완파된 뒤 복원된 동문
9 봉돈 다섯 개의 굴뚝을 가진 봉수대
10 남수문 2012년에 되살아난 마지막 퍼즐 조각
걷기 전에 알아두면 좋은 것
· 출발점은 팔달문이나 장안문이 편합니다. 도로가 성벽을 끊는 구간이 있으니 횡단보도로 건너세요.
· 팔달산 구간은 계단과 오르막이 이어집니다. 편한 신발과 물을 챙기세요.
· 성벽 위 여장(낮은 담) 바깥으로 몸을 내밀거나 성벽에 오르지 마세요.
· 휴대전화에 의궤 도설 사진을 저장해 가면, 시설마다 그림과 실물을 비교하는 재미가 큽니다.
· 관람 시간, 입장료, 해설 프로그램은 바뀔 수 있으니 수원문화재단 수원화성 누리집에서 확인하고 가세요.

장안문 앞에 서면 1951년 사진 속 무너진 문루와 지금의 모습을 겹쳐 보게 됩니다. 그 사이를 이어준 것은 거창한 비문이 아니라, 품삯 2전 5푼과 김노랭이라는 이름까지 적어 둔 성실한 장부였습니다. 성벽을 한 바퀴 돌고 나면, 기록하는 일이 곧 지키는 일이라는 말이 조금 다르게 들릴 것입니다.


참고 자료
1. 「화성성역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ncykorea.aks.ac.kr, E0064682)
2. 「수원화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ncykorea.aks.ac.kr, E0064671)
3.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화성 축성 관련 해설 (contents.history.go.kr, eh_r0310_0010)
4. 수원문화재단 수원화성 누리집, 화성 축성 인력·임금 및 시설 해설 (swcf.or.kr, idx=141 외)
5. 수원일보, 화성 축성 장인 관련 기사 (suwonilbo.kr, idxno=312400)
6. 『정조실록』 20년(1796) 11월 9일 기사 — koya-culture.com 문화 기사(no=150506) 재인용
7. 김장훈, 화성 복원과 의궤 관련 기고, 국가유산청 누리집 (cha.go.kr, nttId=29151)
8.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Hwaseong Fortress" (whc.unesco.org/en/list/817)
9. 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KOCIS), 수원화성 소개 (no.245)
※ 실록·기고문 인용은 위 자료에 실린 문장을 줄여 옮겼습니다. 사진은 Wikimedia Commons(Bernard Gagnon CC0, 국립중앙박물관 공공누리 제1유형, Jpbarrass·Gene Putnam Public domain)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