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SAN · SEOWON WALK
논산 돈암서원 걷는 방법
강당은 91년 늦게 도착했다
遯 巖 書 院
읽는 시간 약 12분 · 둘러보는 시간 약 40분~1시간
논산 연산면의 돈암서원에 들어서면 조금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서원의 정석은 '앞에서 배우고 뒤에서 제사 지내는' 배치입니다. 강당 한 채가 마당 한가운데서 사당을 등지고 서는 것이 보통이지요. 그런데 이곳에는 강당 구실을 하는 건물이 둘이고, 그중 더 크고 오래된 응도당은 축에서 비켜나 옆으로 돌아앉아 있습니다.
이유는 서원의 이사 기록에 있습니다. 홍수에 밀려 서원이 지금 자리로 옮겨온 것은 1880년. 그런데 가장 큰 건물인 응도당은 그때 따라오지 못하고 옛터에 홀로 남았다가, 91년이 지난 1971년에야 합류했습니다. 오늘은 그 늦은 도착을 실마리 삼아 돈암서원을 읽으며 걸어봅니다.
| 위치 |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3길 26-14 |
| 창건 | 1634년(인조 12), 지금 자리에서 북서쪽 약 1.5km 숲말 |
| 이건 | 1879년 착공, 1880년 현 위치로 옮김 (응도당은 1971년) |
| 모신 인물 |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 |
| 지정 | 사적(1993) · 응도당 보물(2008) ·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2019) |
遯
CHAPTER 01
물러난다는 이름의 서원
'돈(遯)'은 물러나 숨는다는 뜻의 글자입니다. 서원 이름은 처음 서원이 섰던 옛터 근처의 바위 이름에서 따왔다고 전해집니다. 세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학문을 닦는다는 뜻과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지요.
서원이 처음 세워진 것은 1634년(인조 12)입니다. 예학의 큰 스승 사계 김장생이 세상을 떠나고 몇 해 뒤, 그 학문을 기리려는 제자들과 지역 유림이 지금 자리에서 북서쪽으로 약 1.5km 떨어진 숲말에 서원을 열었습니다.1 1659~1660년 무렵에는 임금이 이름을 내려주는 사액을 받아, 나라가 공인한 서원이 됩니다.
이후 모시는 인물이 차례로 늘었습니다. 김장생의 아들 신독재 김집이 1658년, 제자 동춘당 송준길이 1688년, 우암 송시열이 1695년(1694년이라는 기록도 있습니다)에 함께 모셔졌습니다.13 조선 후기 기호학파를 이끈 네 사람이 한 사당에 모인 셈입니다.
이 위상은 1871년에 빛을 발합니다. 흥선대원군이 전국 서원을 대거 정리할 때 살아남은 곳은 47곳뿐이었는데, 돈암서원이 그 안에 들었습니다.1 그런데 정치의 칼날을 피한 서원을 정작 위협한 것은 물이었습니다.
水
CHAPTER 02
홍수가 서원을 밀어냈다
숲말의 옛터는 낮은 들판에 가까웠습니다. 1854년과 1874년, 두 차례 큰물이 서원을 덮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4 결국 유림은 서원을 옮기기로 하고, 1877년 서원 일을 맡아보던 유사 송구희가 새 터를 살폈습니다. 공사는 1879년에 시작되었고, 이듬해인 1880년 9월 위패를 새 사당에 모시는 일까지 마무리되었습니다(1881년으로 적은 자료도 있습니다).4
한옥은 못 대신 짜맞춤으로 지은 집이라, 해체해 번호를 매긴 부재를 옮겨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이건에 참여한 연재 송병선은 옮긴 결과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칸의 크기는 비록 크고 작은 차이가 있으나, 규모는 옛것과 새것이 다름이 없다."
— 송병선의 기록, 이철성(2018) 논문 인용 (요지)
옛 모습을 지키려 했다는 자부심이 읽히는 문장입니다. 하지만 '다름이 없다'는 말과 달리, 모든 건물이 함께 옮겨진 것은 아니었습니다.4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한 채가 숲말에 남았습니다.
堂
CHAPTER 03
91년 동안 홀로 남은 강당
남겨진 건물이 강당 응도당(凝道堂)입니다.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분명하게 전하지 않지만, 덩치가 너무 큰 건물이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서원 강당 가운데 손꼽히는 규모로, 기단만 약 17.2m×12m에 이릅니다.2
새 서원에서는 강당이 없으면 공부를 할 수 없으니, 그 자리를 다른 건물이 채웠습니다. 지금 마당 한가운데에서 사당을 등지고 선 양성당(養性堂)입니다. 1971년 응도당이 마침내 옮겨왔을 때 서원의 중심축에는 이미 빈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응도당은 사당과 나란한 축이 아니라 직각으로 꺾인 방향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34
유네스코도 이 사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세계유산 등재 문서는 돈암서원을 설명하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두 구성 요소는 역사 속에서 자리를 옮겼다(two components have been relocated in the historical past)."6
— UNESCO 세계유산센터, 「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요지)
| 연도 | 돈암서원에 일어난 일 |
|---|---|
| 1633 무렵 | 응도당 막새기와 제작 (명문 '숭정 6년 계유') |
| 1634 | 숲말에 서원 창건, 김장생 모심 |
| 1659~1660 | 사액서원이 됨 |
| 1658~1695 | 김집 · 송준길 · 송시열 차례로 추가 배향 |
| 1669 | 서원의 내력을 새긴 원정비 건립 |
| 1871 | 서원 철폐령 속 존속 47곳에 포함 |
| 1854 · 1874 | 옛터에 홍수 피해 |
| 1880 | 현 위치로 이건, 응도당은 옛터에 남음 |
| 1971 | 응도당 이건, 91년 만의 합류 |
| 1993 | 사적 지정 (10월 18일) |
| 2006 | 입구 누각 산앙루 재건 |
| 2008 | 응도당 보물 지정 (7월 10일) |
| 2019 | '한국의 서원' 세계유산 등재 (7월 6일, 바쿠) |
비뚤어진 배치는 실수가 아니라 이력서다.
교과서 같은 일직선 배치였다면 돈암서원은 그저 잘 지은 서원이었을 겁니다. 강당이 둘이고 하나가 옆으로 돌아앉았기에, 홍수와 이사와 91년의 기다림이 건물 배치에 그대로 새겨졌습니다.
禮
CHAPTER 04
책 속 도면을 그대로 세운 집
그렇다면 응도당은 왜 그토록 귀하게 여겨질까요. 이 건물은 김장생이 예법을 정리한 책 『가례집람』에 실린 도면을 따라 지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2 예학자의 서원 강당을 예학자의 책대로 지은 것이지요. 숫자로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① 정면 5칸, 측면 3칸. 서원 강당으로는 큰 편이고, 지붕은 옆에서 보면 'ㅅ' 자 모양인 맞배지붕입니다.
② 2고주 5량. 안쪽에 높은 기둥 두 줄을 세우고 보 위로 도리 다섯 줄을 건 구조로, 넓은 실내를 만들기 위한 방식입니다. 기둥 위에만 공포를 얹은 주심포 양식입니다.2
③ 풍판 아래 눈썹지붕. 맞배지붕 양옆의 박공을 가리는 널판(풍판) 아래에 작은 지붕을 한 겹 더 달았습니다. 비바람이 옆벽을 때리지 않게 한 장치로, 응도당을 알아보는 가장 쉬운 표지입니다.
④ 1633년의 기와. 막새기와에서 '崇禎六年癸酉二月日書院'이라는 글자가 확인되었습니다. 숭정 6년은 1633년으로, 서원 창건(1634)보다 한 해 앞서 기와를 구웠다는 뜻이 됩니다.2
결국 1971년에 옮겨온 것은 단순히 큰 건물 한 채가 아니라, 17세기 예학이 생각한 '바른 강당'의 실물 모형이었던 셈입니다. 2008년 응도당이 서원과 별도로 보물로 지정된 것도 이런 가치를 인정받은 결과입니다.
墻
CHAPTER 05
담장에 쓴 열두 글자
응도당에서 눈을 돌려 서원 가장 안쪽, 사당 숭례사(崇禮祠)로 올라가 봅니다. 김장생과 세 제자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지금도 해마다 2월과 8월 중정일에 제사(향사)를 지냅니다.5
이곳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건물보다 담장입니다. 내삼문과 숭례사를 두른 담에는 검은 벽돌과 붉은 벽돌로 글자를 박아 넣은 꽃담이 있습니다. 전서체로 새긴 열두 글자는 네 글자씩 세 구절입니다.3
地負海涵(지부해함) — 땅이 만물을 짊어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품듯 너그러워라.
博文約禮(박문약례) — 글을 널리 배우되 예로써 스스로를 단속하라.
瑞日和風(서일화풍) — 상서로운 햇살과 온화한 바람처럼 대하라.
특히 '박문약례'는 『논어』에서 온 말로, 예학을 내세운 서원의 성격을 한 구절로 보여줍니다. 다만 이 담을 누가, 언제 쌓았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3 글자의 뜻 풀이도 해석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소개되니 참고만 하세요.
마당으로 내려오면 비석 하나가 서 있습니다. 1669년에 세운 원정비로, 서원의 내력을 송시열이 글로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김만기가 비석 머리의 전서를 썼습니다.1 서원에 모셔진 두 사람이 살아서 함께 만든 기념물인 셈입니다.
한쪽의 작은 건물 정회당에는 김예산이 여덟 살 때 썼다는 현판이 걸려 있다고 전해집니다. 서원에는 김장생의 예서 『상례비요』 목판 2,100판이 전한다고도 소개됩니다.56 예를 연구하고, 예를 찍어내고, 예를 담장에까지 새긴 서원. 돈암서원의 성격이 곳곳에서 일관됩니다.
步
WALK
두 개의 강당을 찾아서
서원 자체는 크지 않아 한 바퀴 도는 데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대신 '왜 여기 있을까'를 생각하며 보면 시간이 금방 갑니다. 입구에서 사당까지 중심축을 따라 오른 뒤, 축을 벗어나 응도당으로 가는 순서를 권합니다.
| 순서 | 지점 | 놓치지 말 것 |
|---|---|---|
| 1 | 산앙루 | 2006년에 다시 지은 입구 누각 |
| 2 | 안마당 · 원정비 | 송시열 글, 송준길 글씨의 1669년 비석 |
| 3 | 양성당 | 1880년부터 강당 자리를 지킨 건물 |
| 4 | 내삼문 · 꽃담 | 벽돌로 박은 전서 열두 글자 |
| 5 | 숭례사 | 네 학자를 모신 사당, 서원의 기준점 |
| 6 | 응도당 | 사당과 직각으로 놓인 방향, 풍판 아래 눈썹지붕 |
| 7 | 응도당 앞에서 돌아보기 | 두 강당과 사당의 축이 어긋나는 모습을 한눈에 |
· 내비게이션에는 '논산시 연산면 임3길 26-14'를 입력하면 됩니다.
· 응도당의 방향을 제대로 보려면 숭례사 쪽 높은 곳에서 서원 전체를 내려다본 뒤 응도당으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 사당은 제향 공간이라 평소 문이 닫혀 있을 수 있습니다. 향사일(2월·8월 중정일)에는 행사가 열리니 조용히 관람하세요.
· 마당이 자갈과 흙이라 비 온 뒤에는 신발이 젖기 쉽습니다.
· 관람 시간, 휴관일, 체험 프로그램은 바뀔 수 있으니 논산시 문화관광 누리집이나 돈암서원 누리집에서 확인하고 가세요.
응도당 앞에 서서 사당 쪽을 돌아보면, 축이 어긋난 두 강당이 한 시야에 들어옵니다. 1880년의 사람들은 서원을 옮기며 "옛것과 다름이 없다"고 적었지만, 실제로 남은 것은 다름의 흔적이었습니다. 그 어긋남 덕분에 돈암서원은 지금도 자기 이사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는 드문 서원이 되었습니다.
참고 자료
1. 「돈암서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ncykorea.aks.ac.kr/Article/E0013025)
2.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 및 국가유산 디지털 자료 (heritage.go.kr)
3. 「돈암서원」, 디지털논산문화대전 (grandculture.net/nonsan, GC02000602) / 조선왕조실록사전(sillokwiki) 「돈암서원」
4. 이철성, 돈암서원 이건 관련 연구 논문, 2018 (KCI ART002399441). 송병선 기록 인용 포함
5. 논산시 문화관광 「돈암서원」 / 돈암서원 누리집(donamseowon.co.kr) / 한국의서원통합보존관리단(k-seowon.kr) 돈암서원 소개 및 이호신 「여행스케치」
6.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whc.unesco.org/en/list/1498) / 오마이뉴스 돈암서원 기사
※ 인용문은 위 자료에 실린 내용을 우리말로 줄여 옮겼습니다. 사진은 Wikimedia Commons(Ryuch, CC BY-SA 3.0 / 한국학중앙연구원·유남해, 공공누리 제1유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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