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과 사찰·서원

정림사지 오층석탑 걷는 방법 — 정복자는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레트블 2026. 10. 17. 16:11

BUYEO · HERITAGE WALK

정림사지 오층석탑 걷는 방법

정복자는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定 林 寺 址 五 層 石 塔

읽는 시간 약 12분 · 걷는 시간 약 1시간 (박물관 포함)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뒤편 강당 복원 건물
PHOTO 01 · 넓은 절터 한가운데 홀로 선 정림사지 오층석탑. 뒤로 보이는 건물은 강당 자리에 세운 보호각이다.

Bernard Gagnon · CC0 (Wikimedia Commons)

부여 시내 한복판, 높이 8.33m의 석탑 하나가 1,400년 가까이 같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백제가 사비로 도읍을 옮긴 무렵 세운 절, 정림사의 탑입니다. 목조 건물은 모두 불타 사라졌는데 이 탑만은 무너지지 않고 남았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1층 몸돌을 들여다보면 이상한 것이 눈에 띕니다. 돌 표면을 빼곡하게 채운 한자입니다. 백제 사람이 새긴 글이 아닙니다. 660년, 백제를 무너뜨린 당나라 군대가 남긴 승전 기록입니다.

승리를 기념하려면 보통 큼직한 비석을 따로 세웁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남의 나라 절의 탑에 글을 새겼을까요. 오늘은 이 질문에서 출발해, 탑의 비례와 이름, 절의 배치, 강당의 석불까지 차례로 읽으며 절터를 걸어봅니다.

위치 충남 부여군 부여읍 정림사지 (부여 시가지 중심)
형태 단층 기단 위 5층 석탑, 노반까지 149개의 돌로 짜 맞춤
연대 백제 사비기 (절은 538년 사비 천도 무렵 창건된 것으로 봄)
규모 탑 높이 8.33m / 절터 약 107×62m
지정 국보 (1962.12.20) · 정림사지 사적 (1983.3.26) ·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2015)

碑

CHAPTER 01

비석 대신, 남의 탑에

1층 탑신 네 면에 새겨진 글의 제목은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풀면 '큰 당나라가 백제국을 평정한 것을 기념하는 비문'입니다. 스스로를 '비(碑)'라 부르는 글이 정작 비석이 아니라 탑에 새겨진 것이지요. 글을 지은 사람은 하수량(賀遂亮), 글씨를 쓴 사람은 권회소(權懷素)이고, 제목은 전서, 본문은 해서로 썼습니다.3 글 끝에는 날짜가 박혀 있습니다.

"顯慶五年 … 八月己巳朔十五日癸未建" (현경 5년 8월 15일에 세운다)
"洛州河南權懷素書" (낙주 하남의 권회소가 쓰다)
— 「대당평백제국비명」 본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금석문 판독문

현경 5년은 660년입니다. 사비성이 함락된 바로 그해, 승전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새긴 글이라는 뜻입니다. 글자 수도 엄청납니다. 탑신에 117행 1,934자, 그 위 옥개받침에 192자, 모두 약 2,126자로 헤아립니다.3 행 수를 114행으로 읽는 판독도 있습니다.4

정림사지 오층석탑 1층 탑신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 글자
PHOTO 02 · 1층 탑신 모서리 기둥돌에 남은 글자. 빛이 비스듬히 드는 오전·오후에 더 잘 보인다.

문화재청 · 공공누리 제1유형 (Wikimedia Commons)

왜 비석을 세우지 않았을까요. 연구자들의 설명은 대체로 '시간'으로 모입니다. 큰 비석을 다듬어 세우기에는 여유가 없었고, 그래서 이미 서 있던 가장 크고 반듯한 돌 구조물, 즉 정림사 탑을 빌렸다는 것입니다.5 실제로 비문 뒷부분으로 갈수록 글씨가 흐트러지는데, 이것을 서둘러 새긴 흔적으로 보기도 합니다.3

"비석이 아닌 석탑의 탑신을 활용해 … 유례가 거의 없는 독특한 것"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당평백제국비명」 (요지)

비문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공을 늘어놓고, 백제를 깎아내리는 말로 가득합니다. 그 가운데 역사가들이 눈여겨보는 부분은 숫자입니다. 당이 차지한 백제 땅을 5방 37군 250성, 호구를 74만 호로 적어 두었는데, 멸망 직전 백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드문 기록입니다.3 글자 홈에서는 붉은 안료 흔적도 확인되었습니다. 새긴 뒤 글자를 붉게 칠해 더 눈에 띄게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편 권회소가 돌에 직접 글씨를 쓰고 새겼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이를 부정하는 연구도 있습니다.10

七

CHAPTER 02

숫자 7로 지은 탑

당나라 군대가 이 탑을 골랐다는 사실은, 거꾸로 이 탑이 그만큼 당당하고 반듯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반듯함에는 계산이 숨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건축학자 요네다 미요지는 탑을 실측한 뒤, 탑 전체가 7척이라는 하나의 단위로 짜여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당시 1척은 약 35cm로 봅니다.56

부위 치수 (요네다 미요지 분석)
지대석 너비 14척 = 7척 × 2
기단 너비 / 높이 10.5척 / 3.5척 (7척의 1.5배와 절반)
1층 탑신 너비 7척
1층 탑신 + 지붕돌 높이 7척
3층 + 4층 높이 7척
2층 + 5층 높이 약 7.2척

정리하면 기단, 1층, 그 위 층들이 모두 7척을 기준으로 나뉘고 더해집니다. 7척을 cm로 바꾸면 약 2.45m. 탑 앞에 서서 1층 몸돌의 폭을 눈으로 재 보면, 생각보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크기라는 게 느껴질 겁니다.

비례 말고도 볼 것이 있습니다. 1층 모서리 기둥(우주)은 가운데가 살짝 부푼 배흘림으로 다듬었는데, 목조 건물의 기둥을 돌로 옮긴 흔적입니다.1 얇고 넓은 지붕돌 끝은 처마처럼 살짝 들려 있어, 그 반전 정도를 약 10분의 1로 보는 분석이 있습니다.6 나무로 짓던 탑을 돌로 번역하면서도 무겁지 않게 보이도록 한 장치들입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단층 기단과 1층 탑신
PHOTO 03 · 낮은 단층 기단과 1층 탑신. 모서리 기둥과 여러 장의 판석을 짜 맞춘 방식이 목조 건축을 닮았다.

문화재청 · 공공누리 제1유형 (Wikimedia Commons)

名

CHAPTER 03

'평제탑'에서 '정림사'로

몸에 새겨진 글 때문에, 이 탑은 오랫동안 엉뚱한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비문 제목을 따 '백제를 평정한 탑', 곧 평제탑(平濟塔)이라 한 것입니다. 백제가 세운 탑이 정복자의 이름표를 달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름을 되찾게 해 준 것은 기와 한 조각이었습니다. 1942년 일본인 학자 후지사와 가즈오가 절터를 조사하다가 글자가 찍힌 기와를 찾았습니다.2 글자는 이렇습니다.

"太平八年戊辰定林寺 …"
— 절터 출토 명문 기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소개)

태평 8년 무진년은 고려 현종 19년, 1028년입니다.1 적어도 고려 때 이 절의 이름이 '정림사'였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탑도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라는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다만 이 이름이 백제 때부터 쓰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이름은 고려의 기와가 알려준 이름이라는 점을 기억해 두면 좋습니다.

탑 안을 들여다본 기록도 있습니다. 1963년 조사에서 4층 남쪽 면에서 사리를 모시는 구멍(사리공)이 확인되었지만, 안에 사리기는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1

伽

CHAPTER 04

한 줄로 선 절, 백제식 배치

탑에서 눈을 떼고 절터 전체를 보면 또 다른 그림이 보입니다. 정림사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중문 – 탑 – 금당 – 강당이 한 줄로 늘어서고, 이를 회랑이 감싸는 '1탑 1금당' 배치입니다. 탑 하나와 부처를 모신 금당 하나를 중심축에 나란히 둔 방식으로, 백제 사찰의 전형으로 꼽힙니다.2

발굴로 드러난 몇 가지 사실이 이 배치를 더 흥미롭게 만듭니다.

① 네모가 아니라 사다리꼴. 회랑으로 둘러싼 절 안쪽은 북쪽이 남쪽보다 넓은 사다리꼴입니다.2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공간이 넓어지는 셈이지요.

② 중문 밖의 연못 두 개. 중문 바깥 동서에 연못이 하나씩 있었는데, 지금까지 확인된 우리나라 사찰 연못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봅니다.2

③ 석탑 이전에 목탑? 절터에서 흙으로 빚은 소조상 조각이 다수 나오면서, 지금의 석탑 이전에 나무탑이 먼저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확정된 사실은 아니고 하나의 가설로 소개됩니다.2

④ 불탄 금당. 금당 터에서는 불에 탄 흙이 확인되어, 백제 멸망 때 화재를 입은 것으로 봅니다.7 목조 건물이 모두 사라지고 돌탑만 남은 이유를 짐작하게 합니다.

절터는 1979~1980년 충남대학교 박물관, 2008~2010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굴했습니다.2 발굴 이전 이곳은 축제가 열리고 장이 서던 빈터였다고 합니다.7

연도 정림사지에 일어난 일
538 무렵 백제 사비 천도, 정림사 창건 (추정)
660 당군, 탑신에 「대당평백제국비명」을 새김
1028 '정림사' 명문 기와 제작 (고려 현종 19), 이 무렵 강당 석불 조성
1942 명문 기와 발견, 절 이름 확인
1962 오층석탑 국보 지정
1963 4층 사리공 확인, 석불좌상 보물 지정
1979~1980 충남대학교 박물관 발굴
1983 정림사지 사적 지정
2006 정림사지박물관 개관
2008~2010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재발굴
2015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佛

CHAPTER 05

강당의 부처는 고려 사람이다

탑 뒤 강당 자리의 보호각 안에는 높이 5.62m의 석조여래좌상이 앉아 있습니다(보물, 1963년 지정). 백제 절터에 있으니 백제 불상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이 불상은 고려 때인 1028년 무렵, 앞서 본 '정림사' 기와와 비슷한 시기에 절을 다시 일으키며 만든 것으로 봅니다.8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과 보호각 내부
PHOTO 04 · 강당 터 보호각 안의 석조여래좌상. 크게 닳은 몸체 위에 모자를 쓴 듯한 머리가 얹혀 있다.

Bernard Gagnon · CC0 (Wikimedia Commons)

몸체는 오랜 세월 마모되어 윤곽만 남았고, 지금의 머리와 갓 모양 보관은 후대에 따로 만들어 올린 것입니다. 손 모양이 뚜렷하지 않아 단정하기 어렵지만, 비로자나불일 가능성이 이야기됩니다.8 백제의 탑, 당나라의 글, 고려의 부처. 한 절터 안에 세 시대가 층층이 쌓여 있는 셈입니다.

정복자는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탑이 증인이 되었다.

당군이 따로 비석을 세웠다면 그 비석은 언젠가 쓰러지고 흩어졌을지 모릅니다. 서둘러 남의 탑을 빌린 덕분에, 패배의 기록과 백제 건축의 정수가 한 몸으로 지금까지 함께 서 있습니다.

界

CHAPTER 06

여덟 곳 가운데 하나

2015년 유네스코는 공주·부여·익산의 백제 유적 8곳을 묶어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세계유산에 올렸습니다. 정림사지는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등재 기준은 (ii)와 (iii)으로, 한·중·일 사이에 건축 기술과 불교가 오간 교류를 보여주고, 백제의 독특한 문화를 증언한다는 점이 인정받았습니다.9

그 '교류'를 이 절터만큼 극적으로 보여주는 곳도 드뭅니다. 백제는 이런 탑과 절을 짓는 기술을 이웃에 전했고, 그 기술의 결정체에 당나라의 승전문이 새겨졌습니다. 주고받은 것이 기술만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정림사지 절터와 오층석탑
PHOTO 05 · 회랑 터 바깥 소나무 사이에서 본 절터. 멀리 오층석탑과 강당 보호각이 한 축에 놓여 있다.

Korearoadtour ·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步

WALK

남쪽에서 북쪽으로, 절의 축을 따라

정림사지는 백제 사람들이 절에 들어서던 순서 그대로, 남쪽 연못에서 시작해 북쪽 강당으로 걸어 올라가면 가장 잘 읽힙니다. 절터 자체는 넓지 않아 천천히 둘러봐도 30~40분, 박물관까지 더하면 1시간 남짓이면 충분합니다.

순서 지점 놓치지 말 것
1 중문 밖 연지 동서로 나뉜 두 연못, 가장 오래된 사찰 연못
2 중문 터 탑·금당·강당이 한 줄로 겹쳐 보이는 자리
3 오층석탑 네 면 1층 탑신의 글자, 배흘림 기둥, 들린 지붕돌 끝
4 금당 터 화재로 사라진 중심 법당의 기단
5 강당 터 보호각 고려 석조여래좌상, 후대에 얹은 머리
6 정림사지박물관 출토 소조상과 기와, 백제 사찰 배치 전시
걷기 전에 알아두면 좋은 것
· 탑 글자는 정면 햇빛보다 비스듬한 빛에서 잘 보입니다. 네 면을 천천히 돌며 각도를 바꿔 보세요.
· 탑 주변에는 보호 울타리가 있습니다. 탑에 손대거나 기단에 오르지 마세요.
· 절터 마당은 그늘이 적은 흙바닥입니다. 여름에는 모자와 물을 챙기세요.
· 정림사지박물관은 2006년 9월 개관했으며, 절터와 함께 둘러보는 동선입니다.8
· 관람 시간, 휴관일, 관람료는 바뀔 수 있으니 부여군청 문화관광 누리집이나 정림사지박물관 공식 안내에서 꼭 확인하고 가세요.

탑을 한 바퀴 다 돌았다면 마지막으로 중문 터로 돌아가 다시 탑을 바라보세요. 같은 탑이지만, 처음에 본 것은 '오래된 돌탑'이었고 지금 보이는 것은 무너진 왕국과 그것을 무너뜨린 자들, 그리고 그 뒤에 절을 다시 세운 사람들의 이야기일 겁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그 모든 것을 한 몸에 새기고도 여전히 반듯합니다.


참고 자료
1.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ncykorea.aks.ac.kr, E0024447)
2. 「부여 정림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0024445)
3. 「대당평백제국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0077970)
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고대금석문 「대당평백제국비명」 판독문·해설
5.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정림사지 오층석탑 관련 해설 (kc_r100430)
6. 백제세계유산센터, 「정림사지」 (요네다 미요지 실측 분석 소개)
7. 부여군청 문화관광, 「정림사지」
8.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E0024446), 「정림사지박물관」(E006945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9.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Baekje Historic Areas" (whc.unesco.org/en/list/1477)
10. 김영관, 대당평백제국비 관련 연구, KCI 등재 학술지, 2013.
※ 비문 인용은 판독문 일부를 옮기고 뜻을 풀었습니다. 사진은 Wikimedia Commons(Bernard Gagnon CC0, Korearoadtour CC BY-SA 4.0)와 문화재청(공공누리 제1유형)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