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과 골목

동피랑 걷는 방법 — 누각은 집 세 채만 가져갔다

레트블 2026. 10. 20. 20:14

TONGYEONG · VILLAGE WALK

동피랑 걷는 방법

누각은 집 세 채만 가져갔다

東 피 랑 · 統 制 營 東 鋪 樓

읽는 시간 약 12분 · 걷는 시간 약 1시간

통영 동피랑마을 골목 담장의 벽화
PHOTO 01 · 동피랑 오르막 골목의 담장 벽화. 벽화는 2년 안팎마다 공모를 거쳐 새로 그려지기 때문에, 이 그림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Mobius6 ·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통영 중앙시장 뒤편, 강구안을 내려다보는 비탈에 작은 집들이 층층이 붙어 있습니다. 담장마다 물고기와 꽃이 그려진 이 동네는 한때 공원 조성을 위해 통째로 헐릴 예정이었습니다. 철거의 명분은 마을 꼭대기에 있던 조선 수군의 옛 시설, 동포루를 되살리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결과는 계획과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동포루는 복원되었지만 사라진 집은 꼭대기의 세 채뿐이었습니다. 300년 넘은 군사시설과 수십 년 된 달동네가 어떻게 한 언덕을 나눠 쓰게 되었는지, 그 협상의 흔적을 따라 골목을 걸어봅니다.

위치 경남 통영시 동피랑1길 일대 (중앙시장 뒤 언덕, 행정동 기준 정량동·태평동 일대)
성격 주민이 실제로 사는 산비탈 주거지 + 공공미술(벽화) 마을
꼭대기 유적 동포루 — 통제영성(통영성)의 세 포루 중 하나, 1694년 건립 기록
벽화 시작 2007년 10월 '동피랑 색칠하기' 전국 벽화 공모
규모 구불구불한 오르막 골목 약 300m, 2007년 당시 약 80가구 120여 명 거주

名

CHAPTER 01

'동쪽 비탈'이라는 이름

'동피랑'은 행정 지명이 아닙니다. 통영 사람들은 비탈을 '비랑'이라 부르는데, 여기에 동쪽의 '동'을 붙여 동피랑이 되었습니다.3 강구안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 서쪽 언덕은 같은 방식으로 '서피랑'이라 부릅니다. 주소로 따지면 정량동과 태평동에 걸친 산비탈 동네를 한데 묶어 부르는 이름입니다.6

마을이 지금처럼 빽빽해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섬에서 뭍으로 나온 사람들, 고향을 잃은 실향민, 뱃일을 하던 사람들이 항구와 시장이 가까운 이 비탈에 터를 잡았다고 합니다.3 2009년 영자 일간지는 이곳을 슬레이트와 시멘트 블록으로 지은 집 50여 채가 지붕을 맞대고 선 동네로 묘사했습니다.4

하지만 이 언덕의 역사는 피란민보다 훨씬 오래되었습니다. 꼭대기에는 300여 년 전 조선 수군이 세운 시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營

CHAPTER 02

도시 이름이 된 군영

'통영(統營)'이라는 도시 이름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줄임말입니다. 경상·전라·충청 3도 수군을 지휘하던 해상 방어 총사령부였지요.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책이 처음 생기고 이순신이 초대 통제사가 되면서, 한산도 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 되었습니다.2

정유재란으로 한산 진영이 무너진 뒤 통제영은 거제와 고성 등지를 떠돌았습니다. 1603년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두룡포, 지금의 통영 문화동에 자리를 정하면서 비로소 정착합니다. 1605년에는 객사인 세병관이 섰고, 이후 1895년 폐지될 때까지 292년 동안 통제영은 이 자리를 지켰습니다.2 그러니 동포루를 "이순신이 세운 시설"이라고 소개하는 글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순신은 통제영의 출발점이지만, 동피랑 위의 포루는 그보다 100년 뒤의 산물입니다.

군영을 둘러싼 성은 1678년(숙종 4) 제57대 통제사 윤천뢰가 쌓았습니다. 북쪽 여황산을 등지고 동쪽과 서쪽 고지를 이어 쌓은 평산성으로, 산지 일부는 흙으로, 나머지는 돌로 쌓았습니다.1 숫자로 보면 그 규모가 그려집니다.

항목 『여지도서』 기록 오늘의 단위로
둘레 11,730척 약 3.6km
높이 15척 약 4.5m
성가퀴(여장) 700타 자료에 따라 707개
문과 시설 4대문, 동·서 암문 2곳, 포루 3곳

※ 『여지도서』와 현대 환산값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통영성지」·「통영 삼도수군통제영」 항목 기준.1,2

鋪

CHAPTER 03

포루는 대포 누각이었을까

안내문과 기사에서 동포루는 흔히 '東砲樓', 곧 대포를 둔 누각으로 적힙니다. 그런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통제영 항목은 같은 시설을 '鋪樓'로 씁니다.2 한자 하나 차이지만 뜻이 달라집니다. 조선 말에 편찬된 『통영지』가 전하는 쓰임새를 보면, 이 건물의 성격은 오히려 후자에 가깝습니다.

"세 개의 포루는 동·서·북쪽 산 정상에 있으며, 1694년 통제사 목림기가 세웠다. 성을 지키던 산성중군이 순찰하고 경비하던 초소였고, 때로는 군사를 지휘했기에 장대(將臺)라고도 불렀다."
— 『통영지』 내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통영성지」 요지)

즉 동포루는 화포 진지라기보다 성의 동쪽 끝을 지켜보던 감시·지휘 초소였습니다.1 언덕 꼭대기에 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강구안으로 드나드는 배와 동쪽 해안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였으니까요. 동포루에서 강구안을 바라보며 시선을 오른쪽으로 옮기면 서피랑의 서포루가, 다시 오른쪽으로 옮기면 세병관 뒤 여황산의 북포루가 보입니다. 세 포루를 선으로 이으면 사라진 성의 윤곽이 대략 그려집니다.7

1895년 통제영이 폐지되고 일제강점기에 성벽과 문루가 헐리면서, 통영성은 지금 토성 터와 석성 일부만 남았습니다.1 동포루 역시 터만 남았고, 그 빈 터 아래로 마을이 들어섰습니다.

筆

CHAPTER 04

망치 대신 붓, 2007년 10월

2006~2007년, 통영시는 동피랑 일대를 사들여 공원으로 만드는 계획을 세웠습니다.5 동포루를 복원하고 주변을 정비하면 관광 명소가 될 것이라는 구상이었지요. 문제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민 대다수가 저소득층이어서, 공시지가 기준 보상금으로는 다른 곳에 새 집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3

이야기는 주민 쪽에서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마을에 계속 살 방법을 찾던 일부 주민이 민관 협의체인 '푸른통영21'에 사정을 털어놓았고,5 2007년 10월 푸른통영21추진협의회와 통영RCE 등이 현장을 돌며 주민 의견을 들었습니다. 결론은 철거 대신 골목 자체를 다시 보이게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3 가장 적은 돈으로 가장 빨리 효과를 낼 수 있는 수단으로 고른 것이 벽화였습니다.5

'동피랑 색칠하기' 전국 벽화 공모에는 미대생 등 18개 팀이 참여해 골목에 꽃과 물고기를 그렸습니다.8 (참가 규모는 자료마다 조금씩 달라서, 젊은 작가 36명이 일주일 동안 그렸다는 보도도 있습니다.4) 벽화에 든 예산은 수천만 원에 불과했다고 합니다.3 훗날 한 시인은 이 마을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무서운 용역 대신 눈빛 선한 화가들이 다녀간 동네 / 망치 대신 붓을 들고 세월의 고단함을 철거해 버린 동네"
— 이명윤, 「동피랑」 부분 (경향신문 2014.5.7 인용)

三

CHAPTER 05

누각과 마을이 나눈 언덕

벽화 골목은 금세 입소문을 탔습니다. 2009년 초 보도에 따르면 평일 20~30명, 주말 200~300명이 찾는 동네가 되었고, 사람들은 이곳을 '한국의 몽마르트르'라고 불렀습니다.4 마을을 지키자는 여론이 커지자 통영시는 2008년 7월 철거 계획을 거둬들였습니다.4

그렇다고 동포루 복원이 없던 일이 된 것은 아닙니다. 시는 포루 복원에 꼭 필요한 마을 꼭대기의 집 세 채만 헐기로 했습니다.3 언덕 전체를 원했던 누각이 꼭대기 한 뼘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사람들에게 돌려준 셈입니다.

동피랑 꼭대기에 복원된 동포루
PHOTO 02 · 마을 꼭대기에 복원된 동포루. 돌로 쌓은 기단 위에 누각을 올렸다.

Mobius6 ·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모두가 반긴 결말은 아니었습니다. 이주 보상을 기대했던 일부 주민은 "바깥 그림은 예쁘지만 낡은 집에 사는 건 지쳤다"며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시는 떠나고 싶은 사람의 집은 사들이고 남고 싶은 사람은 남게 하는 쪽으로 계획을 고쳤습니다. 당시 계획은 약 12억 원을 들여 14채를 매입·수리하고, 그중 9채를 작가들에게 빌려준다는 것이었습니다.4

복원은 '전부 아니면 전무'가 아니었다.

동포루는 터를 되찾았고, 마을은 사람을 지켰습니다. 꼭대기 누각과 그 아래 골목을 한 번에 보는 순간, 이 언덕에서 맺어진 타협이 눈에 들어옵니다.

住

CHAPTER 06

사람이 사는 미술관

동피랑 벽화가 다른 벽화마을과 다른 점은 계속 바뀐다는 것입니다. 2009년부터 열린 담벼락 그림 공모전은 처음 19개 팀에서 2012년 71개 팀, 2014년 68개 팀으로 커졌고, 2014년에는 '벽화비엔날레' 형식으로 열렸습니다.6 벽화를 2년마다 새로 칠하는 방식은 낡은 그림이 흉물이 되는 문제를 막고, 다시 찾아올 이유를 만들었습니다.3

방문객이 늘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 해 100만 명 가까운 사람이 몰리면서 주민들은 소음과 쓰레기에 시달렸습니다.5 주민들은 마을기업과 생활협동조합을 꾸려 기념품 가게 '점방'을 열었고, 수익의 일부를 주민의 수도·전기 요금 등에 보탰습니다.5,6 조합의 사무국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을기업은 '성공'이란 게 없다. 사람이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듯이, 동피랑도 성장 과정이다. 'Best 1'보다는 'Only 1'이 돼야 생명이 길어진다."
— 유용문 동피랑 생활협동조합 사무국장, 경남도민일보 2015.2.4
동피랑 골목의 주민 집 대문과 벽화
PHOTO 03 · 벽화 바로 옆이 주민의 집 대문이다. 문패 번호, 소화기, 우편함이 그림과 나란히 붙어 있다.

Mobius6 ·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사진 속 대문처럼, 동피랑의 그림은 대부분 누군가의 집 담장과 현관 옆에 있습니다. 이 골목을 걷는 사람은 관람객인 동시에 이웃집 앞을 지나는 손님입니다.

연도 동피랑 언덕에 일어난 일
1593 삼도수군통제사 직제 신설, 이순신 초대 통제사(한산 진영)
1603~1605 통제영이 두룡포로 옮겨 옴, 세병관 건립
1678 통제사 윤천뢰, 통영성 축성
1694 통제사 목림기, 동·서·북 세 포루 건립
1895 통제영 폐지, 이후 성벽·문루 철거
한국전쟁 이후 섬 출신·실향민·뱃사람이 모여 마을 형성
2006~2007 통영시, 마을 매입·철거 후 동포루 복원·공원화 계획
2007.10 '동피랑 색칠하기' 전국 벽화 공모
2008.7 철거 계획 철회, 꼭대기 집 세 채만 헐기로
2010.4 두 번째 벽화전 '동피랑 부루스'
2013 주민 생활협동조합 창립
2014 벽화비엔날레 개최

步

WALK

시장에서 포루까지, 그리고 세 포루 찾기

마을 안 골목은 약 300m로 짧지만 오르막이 가파릅니다.3 그림 앞에서 쉬어 가며 꼭대기에 올랐다가 강구안으로 내려오면 1시간 안팎이면 충분합니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남망산에서 동포루, 세병관, 서포루, 북포루로 이어지는 '통영성 걷기'로 넓혀 볼 수도 있습니다.7

순서 지점 놓치지 말 것
1 강구안 · 중앙시장 올려다본 언덕과 꼭대기 누각의 위치
2 마을 초입 골목 이번 회차 벽화, 그림마다 적힌 작가·연도
3 중턱 골목 · 주민 가게 대문·창문과 붙어 있는 그림, 주민 공동 가게
4 동포루 돌 기단과 누각, 헐린 세 채가 있던 꼭대기 자리
5 동포루 안내판 1872년 통영지도 사본과 지금 풍경 비교(2014년 보도 기준)7
6 포루 전망 맞은편 서피랑의 서포루, 여황산의 북포루 찾기
7 강구안으로 하산 여유가 있으면 세병관(통제영)까지 연결
동피랑 언덕에서 내려다본 통영 시내와 바다
PHOTO 04 · 동피랑 언덕에서 내려다본 통영 시내와 바다. 포루가 왜 이 언덕에 섰는지 짐작하게 하는 시야다.

Mobius6 ·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걷기 전에 알아두면 좋은 것 — 주민이 사는 마을의 예절
· 동피랑은 관광지이기 전에 주거지입니다. 골목에서는 목소리를 낮추고,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에는 특히 조용히 지나가 주세요.
· 대문, 창문, 마당 안쪽을 들여다보거나 주민 얼굴이 나오게 촬영하지 마세요. 집 안이 보이는 각도의 사진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 계단·담장 위에 올라가거나 화분, 물통, 빨래 같은 생활 물건을 소품처럼 만지지 마세요.
· 쓰레기는 되가져가세요. 방문객이 남긴 소음과 쓰레기는 주민들이 실제로 겪어 온 문제입니다.
· 골목이 좁고 경사가 급하니 미끄럽지 않은 신발을 신고, 비 온 뒤에는 계단에 주의하세요. 골목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지 마세요.
· 벽화는 공모에 따라 바뀌므로 특정 그림을 보러 간다면 최근 정보를 확인하세요. 주차, 편의시설, 행사 정보는 바뀔 수 있으니 통영시 문화관광 누리집에서 확인하고 가세요.

동포루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300여 년 전 초병이 지켜보던 바다와 오늘 주민들이 빨래를 너는 지붕이 한 시야에 들어옵니다. 누각은 꼭대기의 작은 땅만 가져갔고, 나머지 언덕은 여전히 사람이 사는 동네입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걷는다면, 동피랑의 그림이 왜 '보존'의 다른 이름이 되었는지 조금은 실감이 납니다.


참고 자료
1. 정의도, 「통영성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2.21 최종수정). 『여지도서』·『통영지』 인용 포함
2.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5.2.5 최종수정)
3. 박정헌, 「[쉿! 우리동네] 캔버스가 된 담벼락…'한국의 몽마르트르' 통영 동피랑」, 연합뉴스, 2018.10.13.
4. Kim Sang-jin, "A slum on the brink of destruction is saved by an artistic renaissance", Korea JoongAng Daily, 2009.1.16.
5. 이동욱, 「[우리 동네 사회적경제] 유명세를 기회로 마을가게 연 동피랑 주민들」, 경남도민일보, 2015.2.4.
6. 곽동민·김영훈, 「[우리동네 가보자] 통영 동피랑마을」, 경남일보, 2015.4.15.
7. 김종목, 「포루 따라 걸어보는 통영성… 벽화마을 꼭대기서 시작하는 '역사의 흔적' 그리기」, 경향신문, 2014.5.7.
8. 강신겸, 「한국의 몽마르뜨 동피랑을 아시나요?」, 여행신문, 2010.5.17.
※ 인용문은 위 자료의 내용을 줄여 옮겼습니다. 방문객 수 등 수치는 각 보도 시점의 것입니다. 사진은 Wikimedia Commons(Mobius6, CC BY-SA 4.0)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