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걷는 방법 — 헐다 멈춘 건물이 증거가 됐다
MOKPO · MODERN HERITAGE WALK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걷는 방법
헐다 멈춘 건물이 증거가 됐다
木 浦 近 代 歷 史 文 化 空 間
읽는 시간 약 12분 · 걷는 시간 약 1시간 30분 (관람 포함 반나절)
목포 원도심 번화로 모퉁이에는 회색 돌로 마감한 2층 건물이 하나 서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땅과 쌀을 거둬들이던 회사,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의 목포지점입니다. 지금은 근대역사관 2관으로 쓰이지만, 이 건물은 한때 사라질 뻔했습니다. 1999년 8월, 실제로 철거 작업이 시작됐다가 멈춰 섰고, 석 달여 뒤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됐습니다.5
부수려던 건물이 왜 지켜야 할 건물이 됐을까요. 오늘은 그 질문을 들고, 조선 수군의 진(鎭)이 있던 언덕에서 출발해 영사관, 조계지의 거리, 동척 건물까지 목포 원도심을 한 줄로 꿰어 걸어봅니다. 이 동네는 건물 하나가 아니라 골목 전체가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드문 곳이기도 합니다.
| 위치 | 전남 목포시 원도심, 유달산 동남쪽 만호동·유달동 일대 |
| 성격 | 개항기~일제강점기 거리와 건물이 남은 '면(面)' 단위 근대 유산 |
| 규모 | 114,038㎡, 602필지 · 구역 안 건물 15건 개별 등록 |
| 지정 | 국가등록문화유산 (2018년 8월 6일 등록) |
| 핵심 건물 | 구 일본영사관(사적, 근대역사관 1관) · 구 동척 목포지점(근대역사관 2관) |
鎭
CHAPTER 01
근대 이전, 목포는 수군의 언덕이었다
'근대'를 보러 가는 길이지만 이야기는 그보다 450여 년 앞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동네 이름 '만호동(萬戶洞)'이 단서입니다. 만호는 조선 수군의 진을 지키던 무관의 벼슬 이름입니다.
"목포에도 만호를 두어 바닷길을 지키게 해야 한다."
— 『세종실록』 21년(1439) 4월 15일 기사 (요지)
이 요청 뒤로 목포에는 수군 만호가 머무는 진이 들어섰고, 진을 두른 성은 1501~1502년 무렵 쌓은 것으로 정리됩니다. 목포진은 4백 년 넘게 영산강 하구를 지키다가 1895년 7월 15일 칙령으로 다른 수군 진들과 함께 폐지됐습니다.4
폐지 2년 뒤 목포는 항구 문을 엽니다. 그리고 비어 있던 만호의 관청이 곧 낯선 손님을 맞습니다. 조선 수군의 언덕이 일본 외교관의 언덕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산책을 목포진 터에서 시작하라고 권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 언덕에 서면 영사관이 왜 하필 그 자리에 섰는지가 보입니다.
界
CHAPTER 02
숫자로 보는 경계선: 매립지와 묘지터
목포는 1897년 10월 1일 개항했습니다. 보름 뒤인 10월 16일 '각국공동조계장정'이 맺어지면서 외국인이 거주하고 장사할 수 있는 구역, 조계(租界)가 정해졌습니다. 이 동네를 읽는 열쇠는 그 경계선입니다. 숫자로 놓고 보면 차이가 선명합니다.6
| 항목 | 숫자 |
|---|---|
| 처음 정한 조계 면적 | 726,024㎡ |
| 해벽 축조 후 조계 면적 | 998,082㎡ (해벽 약 1.8km, 1899.6~1901.5) |
| 일본인 중심 거주지 | 갯벌을 메운 평지, 약 1㎢ |
| 조선인 거주지 | 경계 밖 언덕과 옛 묘지터 일대, 약 1.33㎢ |
바다 쪽에 돌로 둑(해벽)을 쌓고 갯벌을 메우자 조계는 넓어졌고, 반듯하게 구획된 평지에는 주로 일본인 상점과 주택이 들어섰습니다. 반면 조선인들은 경계 바깥의 경사지, 원래 무덤이 있던 땅으로 밀려나 살았습니다. 새 시가지를 만드느라 무덤도 옮겨야 했습니다.
"주인이 있는 무덤 53기와 주인 없는 무덤 100기가량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
— 『대한매일신보』 1906년 8월 17일 보도 (요지)
지금 걷는 원도심의 반듯한 바둑판 길은 그렇게 생겼습니다. 같은 시기 항구에서 일하던 조선인 부두 노동자들은 1898년 2월 처음으로 파업을 벌였다고 기록됩니다.7 개항 이듬해 이미 이 항구에 갈등이 쌓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길을 걸을 때 평지와 언덕이 갈리는 지점을 눈여겨보세요. 그 높낮이가 곧 백여 년 전의 경계선입니다.
館
CHAPTER 03
만호청을 빌려 쓰다 붉은 벽돌을 올리다
개항 직후 일본 영사관은 따로 건물이 없어 옛 목포진의 만호청을 빌려 업무를 봤습니다. 이어 영사관 부지로 16,028㎡를 요구했는데, 실제로 확보한 땅은 9,483㎡였습니다. 새 청사는 1900년 1월 착공해 그해 12월 완공됐고, 공사비는 약 7만 원이 들었다고 합니다.1
건물 정면을 보면 지붕 가운데 삼각형 박공, 즉 페디먼트가 솟아 있고, 붉은 벽돌 사이로 흰 벽돌 띠가 층마다 지나갑니다. 당시 목포에서 가장 서양식으로 화려한 건물이었을 것입니다. 이 건물은 이후 주인이 끊임없이 바뀝니다. 1905년 통감부 산하 이사청, 일제강점기 목포부청, 해방 뒤 1947년부터 목포시청, 1974년부터 시립도서관, 1990년부터 2009년까지 목포문화원, 그리고 2014년 목포근대역사관(현 1관)이 됐습니다.1 부청으로 쓰이기 시작한 해는 자료에 따라 1910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1914년(국가유산청)으로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2
본관만 보고 돌아서면 절반을 놓칩니다. 건물 뒤편에는 문서를 보관하던 서고와 산 아래로 파 들어간 길이 약 72m의 방공호가 남아 있습니다. 방공호는 강제 노역으로 판 것으로 전해집니다.2 영사관 건물은 1981년 9월 25일 사적으로 지정됐습니다.
拓
CHAPTER 04
1999년 8월, 철거는 시작됐다가 멈췄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세워진 국책회사로, 조선 각지에 아홉 개 지점을 두고 토지를 사들여 소작을 주고 이민을 들였습니다. 목포지점은 처음 나주에 있다가 1920년 6월 목포로 옮겨왔고, 지금 건물은 1921년 11월 완공됐습니다. 목포지점은 호남의 농장 17곳을 관리했고, 지점 가운데 소작료를 가장 많이 거둔 곳으로 꼽힙니다.4 목포항으로 모인 호남의 쌀이 어디로 향했는지를 생각하면, 이 건물이 항구 가까이 선 이유가 짐작됩니다.
해방 뒤 건물은 해군이 1940년대 후반부터 1974년까지, 이어 헌병대가 1989년 무렵까지 썼습니다.4 군이 떠난 뒤 오래 비어 있던 건물에 1999년 8월 7일 철거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작업은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단됐고, 같은 해 11월 20일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됩니다. 그리고 2006년부터 근대역사관으로 문을 열었습니다.5
안에 들어가면 꼭 찾아볼 것이 금고입니다. 동척 시절 금고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4 소작료로 거둔 돈이 드나들던 바로 그 철문 앞에 서 보면, 이 건물이 남은 일이 왜 중요한지 실감하게 됩니다.
불편한 건물일수록, 남아 있어야 말을 한다.
허물었다면 동척은 교과서 속 한 줄로 남았을 것입니다. 1999년 멈춘 철거 덕분에 지금 우리는 금고 앞에 서서 수탈의 규모를 직접 가늠할 수 있습니다. 목포 원도심이 통째로 유산이 된 출발점도 바로 이 '남겨 두기'였습니다.
面
CHAPTER 05
점이 아니라 면으로 남긴 동네
2018년 8월 6일,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은 목포 원도심 114,038㎡, 602필지를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문화재로 올렸습니다.3 건물 한 채씩 지정하던 기존 방식과 달리 길과 필지를 통째로 묶은 것입니다.
"개별 건물이라는 점(點) 단위를 넘어, 거리와 구역을 선(線)·면(面) 단위로 등록해 보존하고 활용한다."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등록 설명 (요지)
이때 군산, 영주의 근대 거리와 함께 세 곳이 처음으로 이런 방식으로 등록됐습니다. 흔히 '전국 최초'라고 소개되지만 정확히는 첫 번째로 함께 등록된 세 곳 중 하나입니다.8 구역 안에서는 건물 15건이 따로 등록됐는데, 그중 11건이 번화로 한 길에 몰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건물들의 절반가량은 지금도 가게와 살림집으로 쓰입니다.7
그래서 이 동네를 걸을 때는 박물관 관람객과 주민의 눈높이가 겹칩니다. 백 년 전 지어진 집의 1층에서 지금도 장사를 하고, 위층에서 사람이 삽니다. 문화유산이 유리 진열장이 아니라 생활 속에 남아 있다는 점이 '면' 단위 등록의 진짜 의미일지도 모릅니다.
| 연도 | 목포 원도심에 일어난 일 |
|---|---|
| 1439 | 세종 때 목포에 수군 만호를 두자는 요청 |
| 1501~02 무렵 | 목포진 성 축조 |
| 1895 | 칙령으로 목포진 폐지 |
| 1897 | 10월 1일 개항, 10월 16일 각국공동조계장정 |
| 1900 | 일본영사관 청사 완공 |
| 1921 | 동척 목포지점 건물 완공 |
| 1981 | 구 일본영사관 사적 지정 |
| 1999 | 8월 동척 건물 철거 시작 후 중단, 11월 전남 기념물 지정 |
| 2006 | 동척 건물, 근대역사관으로 개관 |
| 2014 | 영사관 건물, 목포근대역사관(1관)으로 개관 |
| 2018 |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면 단위 등록 |
步
WALK
언덕에서 항구 쪽으로, 시간 순서대로
이 동네는 시간 순서와 지형이 거의 겹칩니다. 가장 오래된 목포진 터가 언덕 위에 있고, 영사관이 그 아래, 매립지 위의 상가 거리와 동척 건물이 항구 쪽에 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걸으면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1관에서 2관까지는 걸어서 5분 남짓 거리입니다.5
| 순서 | 지점 | 놓치지 말 것 |
|---|---|---|
| 1 | 목포진 터 | 항구와 원도심이 내려다보이는 위치, 수군이 이 언덕을 고른 이유 |
| 2 | 근대역사관 1관 (구 일본영사관) | 정면 페디먼트, 뒤편 서고와 약 72m 방공호 |
| 3 | 구 목포공립심상소학교 강당 | 개항기 일본인 거류민 학교의 흔적 |
| 4 | 번화로 일본식 가옥 거리 | 등록 건물 11건이 모인 길, 평지와 언덕이 갈리는 경계 |
| 5 | 근대역사관 2관 (구 동척 목포지점) | 석조 외관, 안쪽에 남은 금고 |
· 언덕 위 목포진 터나 1관에서 출발해 항구 쪽 2관으로 내려오는 순서가 편합니다. 1관 앞은 계단이 길어 유모차나 휠체어는 우회로를 미리 확인하세요.
· 등록 건물의 절반가량은 지금도 가게와 주택입니다. 사유지 안으로 들어가거나 창문 안을 촬영하지 마세요.
· 1관 뒤편 방공호는 좁고 어두운 구간이 있습니다.
· 2관은 전시 정비 등으로 임시 휴관하는 때가 있습니다(예: 2025년 11월 약 20일간).6
· 관람 시간, 휴관일, 관람료는 바뀔 수 있으니 출발 전에 목포시 누리집과 목포근대역사관 안내를 꼭 확인하세요.
목포 원도심의 건물들은 자랑스러운 유산이 아닙니다. 수탈하던 회사의 사무실이고, 조계를 다스리던 영사관이며, 조선인을 언덕으로 밀어낸 경계선입니다. 그래서 1999년 여름 철거 장비를 멈춰 세운 결정이 더 무겁게 다가옵니다. 부끄러운 기억을 지우는 대신 남겨서 보여주기로 한 것, 이 동네를 걷는다는 건 그 선택의 결과 속을 걷는 일입니다.
참고 자료
1. 「구 목포 일본영사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ncykorea.aks.ac.kr, E0070953)
2. 국가유산청 보도·설명자료 (2023.6.29, cha.go.kr nttId=86122) — 구 목포 일본영사관 관련
3.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heritage.go.kr)
4. 한국학중앙연구원 목포 근대역사 디지털 아카이브 위키,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목포진」 항목 (dh.aks.ac.kr/~mokpo)
5. 목포문화원, 목포 근대 문화유산 안내 (mokpoculture.or.kr)
6. 목포시 누리집 안내 게시물 (mokpo.go.kr, idx=7450)
7. 목포시민신문, 2022.3.12 기사 (mokposm.co.kr, idxno=29070)
8. 한겨레, 2018.6.25 기사 (hani.co.kr/arti/850485)
※ 실록·신문 인용문은 위 자료에 실린 내용을 요지로 줄여 옮겼습니다. 사진은 Wikimedia Commons(Amlou2518, Mobius6 · CC BY-SA 4.0)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