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산성 걷는 방법 — 성문은 안에서 열렸다
CHEONGJU · FORTRESS WALK
상당산성 걷는 방법
성문은 안에서 열렸다
上 黨 山 城
읽는 시간 약 10분 · 걷는 시간 약 1시간 40분
청주 시내에서 동쪽을 보면 상당산 꼭대기에 띠를 두른 듯한 돌담이 보입니다. 둘레 약 4.2km, 조선 후기 충청도 육군의 배후를 지키던 거대한 산성입니다. 이 성에는 기록으로 남은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외적에게는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지만, 단 한 번 성문이 열린 적이 있다는 것. 그것도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서였습니다.
오늘은 그 문이 왜 열렸는지를 따라가며, 돌 하나에 새겨진 이름과 사라진 연못, 북쪽에 없는 문까지 차례로 읽으며 걸어봅니다.
| 위치 | 충북 청주시 상당구 성내로124번길 14 (산성동) |
| 형태 | 포곡식 석축 산성 (골짜기를 품고 능선을 따라 쌓은 성) |
| 규모 | 둘레 약 4.2km (자료에 따라 4.4km), 성벽 높이 대부분 2.4~4.7m |
| 현재 석성 | 1716년(숙종 42) 착공, 1747년(영조 23) 무렵 완성 |
| 지정 | 사적 (1970년 10월 1일) |
名
CHAPTER 01
이름부터 수입품이었다
'상당(上黨)'은 청주의 옛 이름입니다. 흔히 백제 때 이곳을 상당현이라 불렀다고 소개되지만,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중국 산서성에는 지금도 한자까지 똑같은 '상당구(上黨區)'가 있는데, 고대 중국에서 기자(箕子)가 다스렸다고 전해지는 땅입니다. 고려 때 기자의 후손을 자처한 청주 한씨가 자기 고향 청주에 그 이름을 빌려 붙였다는 설명입니다.1 같은 무렵 충주는 '대원', 진천은 '상산'이라는 중국 지명을 별호로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성은 언제 처음 쌓였을까요.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성 안에서 '사량부(沙梁部)'라는 신라 행정구역 이름이 찍힌 기와 조각이, 남문 밖에서는 7세기 후반의 도장무늬 토기 조각이 나왔습니다. 적어도 통일신라 무렵에는 이 산에 성이 있었다는 뜻입니다.2
"궁예가 성을 쌓았으나 견훤이 빼앗았고, 그 뒤 왕건이 차지했다."
— 승장 영휴, 『상당산성고금사적기』(1744)
후삼국의 세 영웅이 모두 이 성을 거쳐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야사지만, 실제로 성 안에서 9~10세기 기와 조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전설과 유물이 반쯤 겹치는 지점, 상당산성의 이야기는 늘 이렇게 시작됩니다.
怨
CHAPTER 02
원균의 공사, 백성의 원망
상당산성이 실록에 또렷하게 등장하는 건 임진왜란 중입니다. 주인공은 의외의 인물, 이순신과 끝없이 다투던 원균입니다. 두 장수의 갈등이 조정 문제로까지 번지자, 선조는 1595년 2월 원균을 바다에서 떼어내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보냈습니다.
새 임지에서 원균이 가장 의욕을 보인 일이 상당산성 수축이었습니다. 움막에 머물며 공사를 독려했다고 하지요. 하지만 방식이 문제였습니다.
"원균은 상당산성에서 성을 쌓을 때 형편을 살피지 않고, 피폐한 고을이건 넉넉한 고을이건 가리지 않고 각각 2~3백 명씩 내게 하여 부역을 독촉하므로… 이 농사철에 백성이 밭에 나가 농사짓지 못하니 원망이 더욱 극에 이르렀다."
— 『선조실록』 29년(1596) 5월 7일 (요지)
그해 8월 원균이 전라도로 옮기면서 공사는 멈췄습니다. 이후 이시발과 최립에게 다시 성을 쌓게 했지만 도중에 무너져 그만두었다는 기록도 전합니다.2 상당산성의 첫 번째 돌성 프로젝트는 그렇게 실패로 끝납니다.
僧
CHAPTER 03
승려들이 쌓고, 돌에 이름을 새기다
전환점은 1651년(효종 2)이었습니다. 충청도 54개 고을의 육군을 지휘하는 병영이 서해안 해미에서 청주로 옮겨온 것이지요. 청주읍성에는 병마절도사가, 상당산성에는 그를 보좌하는 병마우후가 머물며 읍성의 뒤를 받치는 구조가 만들어졌습니다. 상당산성은 이제 충청도 방어의 '마지막 보루'가 됐습니다.
본격적인 돌성 공사는 숙종 때 시작됩니다. 1716년 옛 터를 따라 돌로 다시 쌓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도 돈과 사람이 문제였습니다. 조정은 1718년 명예직 벼슬 임명장인 공명첩 수백 장을 팔아 공사비를 마련했고, 농민 대신 충청도의 승려들을 승군으로 징발했습니다. 1720년에는 이들이 머물 절로 구룡사와 남악사를 성 안에 세웠습니다.1
공사는 1747년(영조 23) 무렵 마무리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18세기 중반 전국 읍지를 모은 『여지도서』는 완성된 성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둘레 7,275척, 높이 9척, 성문 셋과 암문 둘, 포루 15곳, 성가퀴(여장) 1,176첩, 연못 4곳, 우물 15곳.2
그리고 이때 쌓은 성벽에는 특별한 흔적이 남았습니다. 남문을 비롯한 성문과 성벽 곳곳에 공사를 맡은 사람들의 이름과 관직을 새겨 넣은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누가 쌓았는지 알 수 있게 한, 말하자면 18세기의 공사 실명제였습니다. 이 이름들 가운데 하나가 몇 년 뒤 이 성의 운명을 바꿉니다.
| 연도 | 상당산성에 일어난 일 |
|---|---|
| 7세기 후반 | 통일신라 토기·기와 출토, 초축 추정 시기 |
| 1596 | 충청병사 원균이 수축, 백성 원성 속 중단 |
| 1651 | 충청 병영이 해미에서 청주로 이전 |
| 1716 | 숙종, 돌성으로 개축 시작 |
| 1720 | 승군을 위한 구룡사·남악사 창건 |
| 1728 | 이인좌의 난, 성문이 안에서 열림 |
| 1747 | 대대적 개축 마무리, 현재 모습 완성 |
| 1907 |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폐성 |
| 1940 | 성안 연못을 저수지로 개조, 성벽이 둑으로 |
| 1970 | 사적 지정 |
| 1977~1992 | 성문 문루 복원, 동장대 재건 |
門
CHAPTER 04
1728년 3월, 성문은 안에서 열렸다
1728년(영조 4) 3월 15일, 이인좌가 이끄는 반란군이 청주읍성을 기습해 점령했습니다. 이인좌는 할아버지가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남인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정치적 몰락으로 과거조차 볼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반란군은 곧이어 상당산성까지 손에 넣습니다.
난공불락이어야 할 산성이 어떻게 그리 쉽게 넘어갔을까요. 답은 성 안에 있었습니다. 성 보수 공사에서 작업반장 격인 패장(牌將)을 맡았던 양덕부라는 인물이 반란군에 포섭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지금도 초정 방향으로 난 동북암문 돌에 공사 책임자로 새겨져 있다고 전해집니다.1 자기가 쌓은 성의 문을, 자기가 연 셈입니다.
성을 지키던 병마우후 박종원은 문이 열리자 곧바로 항복해 반군에 가담했습니다. 이인좌는 스스로 대원수가 되어 신천영에게 산성 수비를 맡기고 북쪽으로 진군했지만, 경기도 죽산에서 관군에 붙잡혀 한양에서 처형됩니다.
그리고 상당산성의 문은 한 번 더, 또 안에서 열립니다.
"이때 신천영 등이 성문을 닫고 스스로 지키고 있었는데, 장교 등이 성을 지키는 군졸을 몰래 꾀어 문을 열고 들여보내 드디어 신천영과… 이인좌의 동생 이기좌 등을 포박했다."
— 『영조실록』 4년(1728) 3월 27일 (요지)
반란군에게 문을 열어준 것도, 반란을 끝낸 것도 성 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의병장 박민웅이 신천영 일당을 그 자리에서 처형하면서, 열이틀 만에 상당산성은 다시 조정의 손에 돌아갑니다.1
성벽은 바깥을 막고, 사람은 안을 지킨다.
높이 4m가 넘는 돌벽도 안에서 걸린 빗장 하나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상당산성이 '난공불락'이라는 말보다 '단 한 번 열린 성'으로 기억될 만한 이유입니다.
石
CHAPTER 05
북문이 없는 성, 안쪽에 쌓은 옹성
성을 걸으며 꼭 보아야 할 것은 문입니다. 상당산성의 문 셋은 모양이 다 다르고, 모양마다 이유가 있습니다.
① 북문이 없다. 동·서·남에 문이 있지만 북쪽에는 없습니다. 북쪽 사면이 따로 방어시설이 필요 없을 만큼 가파르기 때문입니다.3 북벽 일부는 높이가 90cm 안팎에 불과한데, 지형 자체가 성벽 노릇을 하기 때문이지요.2
② 남문 공남문: 옹성이 안에 있다. 옹성은 성문 앞을 반원형으로 한 겹 더 감싸는 시설로, 보통 수원화성처럼 문 바깥에 둡니다. 그런데 공남문은 문 바깥이 경사가 급해 공간이 없자 성 안쪽에 옹성(내옹성)을 쌓았습니다. 문을 통과하자마자 거대한 돌벽이 앞을 막아서는 이유입니다. 공남문은 세 문 중 유일한 홍예문으로 너비 420cm, 높이 350cm입니다.
③ 서문 미호문: 나팔처럼 벌어진 입구. 서문 앞도 경사가 급해 옹성을 쌓을 수 없었습니다. 대신 문으로 들어가는 길을 나팔관처럼 좁혀 들여쌓았습니다. 적이 문에 붙으면 양옆 성벽 위에서 동시에 활을 쏠 수 있는 구조입니다.
④ 동문 진동문: 꺾인 성벽 한가운데. 동문은 '〈' 자로 꺾인 성벽의 안쪽 꼭짓점에 일부러 배치해, 역시 양쪽에서 공격할 수 있게 했습니다.1 동문과 서문은 네모난 평문으로 너비 280cm, 높이 270cm입니다.2
池
CHAPTER 06
저수지 둑은 원래 성벽이었다
성 안 식당가 옆 저수지는 산성의 원래 풍경이 아닙니다. 조선 시대 이 자리에는 연당(蓮堂)이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구례 운조루에 전하는 「상당산성도」를 보면 연못 가운데 작은 섬에 소요정(逍遙亭)이라는 정자와 버드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면서 산성은 군사시설의 역할을 잃었고, 1940년 일제는 인근 낭성면의 농업용수를 늘리려고 이 연못을 저수지로 만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연못 앞 성벽은 저수지 둑이 되었고, 성벽 아래를 지나던 수문은 헐렸습니다. 지금도 둑 아래쪽을 보면 성돌이 드러나 있습니다.1
무너진 문루들은 1977년부터 1980년 사이 복원되었고, 동장대 역할을 하던 동화정은 1992년에 다시 지어졌습니다. 우리가 보는 상당산성은 18세기의 돌 위에 20세기의 개조와 복원이 겹쳐진 결과물인 셈입니다.
步
WALK
성벽을 따라 한 바퀴
둘레길은 남문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돌아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성곽을 따라 약 4km, 오르내림이 있지만 본격 등산로보다는 완만합니다. 사진을 찍으며 쉬엄쉬엄 걸으면 1시간 30분~2시간을 잡으세요.3
| 순서 | 지점 | 놓치지 말 것 |
|---|---|---|
| 1 | 남문 앞 잔디광장 | 김시습 시비 「산성에서(遊山城)」 |
| 2 | 공남문 | 홍예문, 문 안쪽의 내옹성 |
| 3 | 치성 · 서남암문 | 밖으로 튀어나온 성벽, 비밀 통로 |
| 4 | 서장대 터 | 청주 시내 전망, 지휘소 제승당 자리 |
| 5 | 서문 미호문 | 나팔처럼 좁혀 들여쌓은 입구 |
| 6 | 북벽 · 수구 | 낮아지는 성벽, 북문이 없는 이유 |
| 7 | 동북암문 | 1728년 이야기의 무대, 성돌의 각자 |
| 8 | 동문 진동문 · 동장대 | 꺾인 성벽 속 문, 복원된 동화정 |
| 9 | 저수지 · 성안마을 | 둑 아래 드러난 옛 성돌 |
· 출발점은 성 아래 주차장(청주시 상당구 성내로 68 일대)이 편합니다.
· 성곽 위 길은 그늘이 적은 구간이 있어 모자와 물을 챙기세요. 비 온 뒤에는 흙길이 미끄럽습니다.
· 상당산성관리소에 문화관광해설사가 상주해 해설을 들을 수 있습니다.
· 보름달 뜨는 밤 서문 쪽 능선은 청주 야경 명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야간에는 반드시 일행과 함께 걸으세요.
· 운영 시간, 주차 요금, 해설 시간은 바뀔 수 있으니 청주시 문화관광 누리집에서 확인하고 가세요.
· 대중교통은 862번 버스가 상당산성까지 직접 운행합니다(청주시청 등 시내 경유, 정확한 배차간격은 청주시 버스정보시스템에서 확인하세요). 주차장에서 걷기 시작하는 경우를 기준으로 원점회귀 코스입니다.
남문 앞 시비에는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서 읊은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멀리 바라보니 산하는 웅장하고, 높이 오르니 의기는 드높아라." 성벽 위에 서서 이 구절을 읽고 나면, 이 성이 지키려던 것이 돌이 아니라 그 아래 펼쳐진 고을과 사람이었다는 게 조금은 실감 납니다.
참고 자료
1. 조혁연, 「역사 따라 걷는 산성길 17. 청주 상당산성」, 중부매일, 2025.1.20. (『선조실록』·『영조실록』·구룡사 사적비 인용 포함)
2. 백종오, 「상당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2.21 최종수정). 『여지도서』·『상당산성고금사적기』 인용 포함
3. 현경숙, 「[걷고 싶은 길] 가을 예감 청주 상당산성 둘레길」, 연합뉴스, 2025.10.3.
4.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청주 상당산성」 /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호서 지방을 지켜준 귀중한 요새, 청주 상당산성」
5. 「청주에 城이 있다, 그 성에 가고 싶다」, 동아일보, 2025.1.31.
※ 실록 인용문은 위 자료에 실린 번역을 줄여 옮겼습니다. 사진은 Wikimedia Commons(Gcd822, CC BY-SA 4.0)입니다.
※ 이 글은 운영자가 직접 답사한 체험기가 아니라, 위 공개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콘텐츠입니다. 도보 소요 시간은 실측이 아니라 지도 좌표 기반 추정치입니다.